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평범한 일상 빼앗긴 광주 시민들
한국일보 기자 기록 사진 중 미공개 컷 발굴
“그날 새벽 총소리가 들렸지만 무서워 나갈 수가 없었다.
동이 틀 무렵이 돼서야 카메라를 숨겨 도청으로 향했다.
계엄군이 금남로를 활보하고 YMCA 앞에선 총에 맞은 청년의 주검이 누워 있었다.
도청에 들어서니 계엄군이 시민군들의 목을 군홧발로 밟고
굴비 엮듯 등 뒤로 포승줄을 묶고 있다. 비참한 현장이다.”
1980년 5ㆍ18광주민주화운동 현장을 취재한 박태홍(77) 전 한국일보 사진부
기자(현 뉴시스 편집위원)는 계엄군이 전남도청 진압작전을 개시한 5월 27일 아침을 이렇게 회고했다.
5ㆍ18을 전후해 한국일보는 4명의 사진기자를 광주에 파견했다.
당시 김해운, 한륭, 박태홍, 김용일 기자가 취재한 사진은 2,000여컷남짓.
무자비한 진압과 처절한 저항의 장면들 사이에서 시민의 일상은 심하게
일그러진 채로 기록돼 있다. 40년 전 5월, 광주 시민들의 삶을 미공개 사진으로 되돌아 보았다.
박 전 기자는 1980년 5월 21일 밤 광주에 도착했다.
신군부의 비상계엄 조치가 전국으로 확대된 지 3일 만이다.
열차는 종착역인 광주역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송정리역에 멈춰 섰다.
불과 몇 시간 전 금남로 일대에서 공수부대가 시위대에 집단 사격을 가해 54명이 숨졌고,
시위대는 장갑차와 총기, 탄약을 탈취해 자체 무장에 나섰다.
이날 오후 5시 30분경 공수부대가 시 외곽으로 철수할 때까지 산발적인 시가전이 이어졌다.
송정리역 앞 여관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운 그는 아침 일찍 도청으로 향하기 위해
몰려든 시위대를 촬영했다. 100여명의 젊은 청년들 중엔 소총을 든 여성도 있었고,
교련복을 입은 어린 학생들도 앞다퉈 버스와 트럭에 올랐다.
신군부에 의해 자행된 무자비한 탄압이 여리디 여린 손마다 총을 들게 만들었다.
공수부대가 시 외곽으로 물러난 21일 이후 광주 도심은 일시적인 ‘해방구’가 됐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순찰을 돌고 프락치로 의심되는 이들을
색출해 내던 이들은 시민을 지키는 ‘시민군’이었으나 훗날 ‘폭도’의 누명을 썼다.
방석모에 방석복을 입고 비장한 눈빛으로 전선에 투입되던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모두 누군가의 자식이고, 부모였다.
비극을 모르는 아이들 눈에 5ㆍ18은 전쟁놀이와 다름 없었다.
24일 광주 시내의 한 주택가 골목, 10세 안팎의 아이들이 종이로 만든 헬멧과
방탄조끼를 걸친 채 몽둥이를 들고 골목을 행진했다. 우렁찬 구호를 외치며
몽둥이를 휘두르던 아이들이 흉내 낸 건 계엄군이었을까 시민군이었을까.
박 전 기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의 천진한 웃음 소리에 가슴이 아려왔다”고 말했다.
이날 도청 뜰엔 관에 넣지도 못한 시신이 널브러졌고,
적십자병원에선 사망자 명단이 한쪽 벽을 빼곡히 뒤덮었다.
25일 전남 장성군으로 이동한 박 전 기자는 시외버스 편으로 필름을 송고한 후
다음날 다시 광주 시내로 향했다. 당시 시내 중심부로 이동을 시작한
계엄군의 검문을 받았는데, 계엄군 소위가 “위험하다”며 보내주지 않았다.
소위는 “오늘 밤 진압 작전이 시작되는데, 만약 도청 지하에 쌓인 엄청나게 많은
다이너마이트가 터지면 반경 500m 내는 쑥대밭이 된다”고 전했다.
소위는 또 “내 여동생이 시민군에 합류했는데 걱정”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도청 인근 여관에 투숙했지만 그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시민군 진영에서도 26일 이 같은 계엄군의 진압 작전을 예측하고
여성과 어린 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진압 작전이 개시되면 도청 사수는커녕
이들의 생명 또한 지켜내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27일 계엄군이 점령한 도청에선 차마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처참한 광경이 펼쳐졌다.
초파일(21일)에 벌어진 혈전으로 갈기갈기 찢긴 광장의 봉축탑은 그로부터
엿새 후 또 다시 계엄군의 총탄에 쓰러져 가는 시민들을 지켜봤다.
도청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청년이 계엄군의 군홧발에 목이 짓눌리는
동안 바로 옆에선 이미 숨을 거둔 주검들이 말없이 누워 있었다.
사진=김해운ㆍ한륭ㆍ박태홍ㆍ김용일 전 한국일보 사진부 기자
박서강 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